안개 88

나처럼은 말고

어렸을 땐 5살형들과 맛짱 뜬 주먹이래 젊어서는 이빨로 차력을 과시도 했고 서울로 유학 간 큰 형님을 대신해서 기울어져가는 집안 농사도 몸이 부서지도록 다 지었다지 추종하는 아우들의 의리로 읍내에서는 누구도 힘으로 범접도 못했다는 그가 기타 치고 노래하는 형수와 눈이 맞아 도주하듯 고향을 떠나 처갓집 옥천 청산면에 들어왔던 거야 가족들과 드문 연락으로 지내며 고생 고생 힘든 삶 술로 위로하며 살았는데 결국 위암으로 칠십 중반의 나이에 "꽈당" 고목처럼 그의 생도 넘어 간 거야 코로나의 영향일 테지만 장례식장도 그의 살아온 자취처럼 조촐했지 영정 앞에 잔을 들이다가 어깨를 들먹이며 쓰러져 흐느끼는 그의 아우 상욱형을 일으키려다 영정사진의 눈빛과 마주쳤는데 엿튼 미소의 그가 내려다보며 "아우야! 나처럼은 말..

안개 2020.07.14

점심은 제가 살게요

저 징검다리 중간쯤 큼지막한 너럭바위가 있는디 글쎄, 고것이 누우면 내 등판 짝에 딱 맞는 당게요 한여름 복지경 더위 피해 잠자는 장소 지라 밤 열한 시쯤 되면 추위서 잠이 깨는데 글씨, 깜짝 놀래 버려 이깟 건 아무것도 아니지라 물안개가 버드나무 발목까지 깔리면 저 멀리 흐릿한 마을이 꿈이 당가 생시 당가 밤하늘 색색의 별들이 가득 넘쳐 떨쳐 내릴 것만 같고...... 그랑게 무릉도원이라 할까나 뭐라 설명할 수가 없어버려 아따, 겁나게 아름답지라 혼자 보기 아까워서 사진으로 담으면 참 좋겠구나 생각했는디 그란디 선상님 혹시, 그때 전화하면 올 수 있는 가요 아, 네 그러지요 어디, 광주에서 오셨소 아니요 서울에서요 그럼 오시긴 그렇구먼요 아니에요 불러만 주시면 점심은 제가 살게요 2020.06.12. ..

안개 2020.06.16

경계 너머

경계까지는 가 봐야지 뭐라도 건질 수 있으니 엎어져 봐야 바위가 단단하다는 걸 알지 부딪혀 봐야 벽이 두터운지 알지 흔들려 봐야 바람이 얼마나 부드럽고 강한 줄 알지 시작했으니 되든 말든 끝까지는 가 봐야지 부서지든 이뤄지든 적당은 말고 강 하나는 건너야지 접지 말고 산 하나는 넘어야지 뭐든 태우고 싶다면 경계는 부수는 거야 바랄 것도 없어 기대하는 것도 그리 없는데 하지만 그저 좋을 뿐이지 바라만 봐도 좋아 그저 있어만 줘도 좋아 2020.05.30. 예당호

안개 2020.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