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88

낙엽

물 속이라도 바람 속일지라도 거침이 없다 미련도 없다 가볍게 떠나는 이들은 모두 속을 비웠다 우울하게 세월을 맞이하는 나무는 없네 상황의 노예인 계절도 없다네 겨울의 끝은 봄이고 가을의 끝이 겨울의 시작이라네 되돌릴 수 없지만 항상, 다시 할 수 있네 이치의 자연 안에 끝은 없고 시작은 있네 덤덤히 맞으라 하네 가볍게 걸어가라 하네 2021. 11. 18. 진안.

안개 2021.11.23

주산지 왕버들

몸속으로 세월의 바람 들여 가을을 태우는 왕버들 울음소리 "우우웅" 환청인가 들려오네 숨 쉴 날 머지않았음에도 피기를 지기를...... 두껍게 접어놓은 퇴적의 세월층 앞에 고개 숙이고 싶네 허리 밑 물 잠긴 체로 관절 마비되고 부러져도 푸르른 날들 건너 온 왕버들 투박한 껍질 위로 안개를 밀고 불어오는 시린 바람이 아리네. 지탱해 주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모든 꽃들이 피어난다 주산지 왕버들 인내가 꽃이다 2021. 11. 05. 청송 주산지.

안개 2021.11.16

가을이 말을거네

가을이 몸으로 말을 거네 나무는 행동으로 표현하네 진솔함은 채우는 게 아니라 내려놓는 일이라고 노랗게, 빨갛게 색을 지워놓네 저 산, 저 들이 시름없이 비우네 가을이 온몸으로 말을 하네 호수를 지우는 안개처럼 미련 없이 옷을 벗는 나무처럼 아득한 뒷모습은 지워야 한다고 열려있는 하늘은 비워야 한다고 가을에는 새벽이 나무가 말을 건다 2021. 11. 03. 괴산 문광지

안개 2021.11.09

물안개

물결 같은 흔들림일랑 지워 버려야겠네 길지는 않으니 더 멀리 더 넓게 펼쳐 보아야겠네 호흡을 낮춰 가만히 바라다보면 무거운 가슴이 가벼워지는 것이라고 알려주고 싶네 희망은 바닥에서 피어나야 가뿐히 올라가는 것이라고 사랑은 불같이 뜨겁게 지펴야 한다고 말 걸어야겠네 먼지처럼 푸석한 가슴 이슬처럼 玲瓏영롱히 젖었으면 좋겠네 희망은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 잔잔한 가슴, 파문으로 번지네 사랑은 광장을 밝히는 촛불 내 구석진 마음, 훤히 밝아오네 2021. 10. 21. 진천 백곡지.

안개 2021.10.26

그렇구나

그 봄 이름 모를 산자락마다 눈이 부셨지 아낌없이 뜨겁게 피어 그곳 꽃자리인 줄 알았어 스치는 것은 바람 같아 흘려 보냈지만 만나는 것은 매듭 같아서 타래처럼 곱게 엮고 싶었지 바람은 얌전히 절여두고 고요일랑 밤 새 고아 곰국 같은 뽀얀 호수 찐하게도 우려 놓았네 잎새마다 맺힌 햇살로 잉걸 같은 이글대는 새벽 그렇구나 시작은 뜨겁게 여는 거였구나 차이 나는 것이 만나서 내는 충돌은 크지 불은 뜨겁고 물은 차갑고 부딪쳐 봐야 사달이 나는 거야 낮과 밤 밤과 낮 경계에서 일이 벌어지지 숨어 있던 안개 불처럼 찐하게 다 피워내는 거야 예당호에서

안개 2021.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