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88

봄!

속절없이 다가와 준비가 안 됐더랬지 느끼려니 했는데 숨소리 한 번 스쳤을까? 손을 내밀기도 전에 민망한 작별을 서두르다니 그럭저럭 모르게 밍밍 할 것이지 눈부셔 휘둥거리며 바라만 봤지 휘저으며 가슴을 관통 하지나 말든지 가는 그댄 샤프하겠지만 남은 나는 미련하지 에라! 몹쓸 사랑아. 고여 있으면 썩는다지만 머물러 있으면 식는다지만 얼굴은 본건가? 감도 못 잡았는 데 이리 휘집고서 가시다니 또 기다리게 하시다니 눈길을 주지나 말던지 멋이나 없던지 갈 거라면 왜, 서럽게 스스로의 풍경을 명작으로 만드셨나요?

안개 2021.04.13

如如여여

허술히 소비시킨 시간과 채우지 못해 흘려보낸 갈증으로 애태우던 사랑아! 타오르는 불꽃이라든가 몰아치는 천둥벼락이라든가 젊은 날들의 숭배라든가 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제는 그림 같은 여백으로 노래 같은 여운으로 풍경 같은 여여함으로 오소서. 남한강변의 한파 속에서 강하게 살아나는 물안개로 인하여 버드나무의 빈 가지며 잠들었던 물오리들이며 활기로 가득합니다 소리를 내지도 설명을 하지도 않는 여여한 풍경 멍~~~~~ 바라봅니다 안개가 다 가실 때까지요 2021. 01. 남한강

안개 2021.01.26

강변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건 가려서도 보라는 거겠지 제동을 거는 건 서두르지 말라는 걸 테고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건 시들지 말고 가라는 거겠지 물새가 날면 새벽이 열린다 추워야 붉어지는 노을 얼어야 하얗게 질리는 들판 극에 도달하면 다 꽃이다 길 위로 눈이 내리고 기온은 -18℃란다 장애물 뒤에 찬스가 있다 강가의 나뭇가지마다 하얀 꽃이 필 것이고 새벽하늘은 불처럼 붉어질 것이다 가장 붉고 추운 곳에서 날개를 펴는 철새들처럼 난, 하염없이 바쁘다 실패든 성공이든 시도는 항상 행복하다 열정이 마음속에 숨쉬기 때문이다. 2021. 01. 09. 서산 해미천.

안개 2021.01.12

마음의 色색

말속에는 마음이 담겨있지 마음속에 색깔이 있기 때문이야 어떤 말(언어)은 진흙처럼 혼탁 하고 어떤 말은 샘물처럼 청아 하지 채도를 낮추면 깊어지고 명도를 높이면 강해지고 오래 갈건가 즐겁게 갈건가 아니면 어둡게 갈건가 어지럽게 갈건가 잘 꺼내 써야지 마음의 색 아름답게 칠해야 하니까. 아,안개여 다 표현하지 않고도 다 보여주지 않고도 깊은 풍경이 칠해주는 겸허의 색 오색의 찬란을 다 보여주려 했을 텐데 하나라도 더 뽐내려 했을 텐데...... 무색이라니? 보성강, 새벽안개를 뿌려놓고서 "이럴 수도 있는 거야" 온화해지라 합니다. 2020. 11. 보성강.

안개 2020.12.01

당신이 붉어서

만추의 풍경이 깊은 바다였네 들어오긴 했다만 한 호흡에 수면까지 나가려면 아무래도 숨을 아껴야겠네 늦은 가을이 가슴을 열어 놓고서 "나를 보세요, 날 보러 오세요" 외치네 그가 가는 길로 나도 따라가고 싶었네 당신이 붉어서 나도 붉어졌네. 똑같을 순 없잖아 흔들리는 게 일인데 흐릿한 게 일상인데 마음 같지 않다고 고백해 버릴까 아무 때는 아니야 조급해 보이기 싫어서 짧아도 좋아 한 순간일지라도 당신을 그대로 담아 비추면 그게 내 마음인 줄 알라고. 2020.11.12. 진안 용담댐

안개 2020.11.24

11월

내 사랑, 넘쳤으면 좋겠다 防築방죽을 넘나드는 장맛비처럼 산을 삼키는 건조한 火魔화마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한 살배기 우리 손자처럼 새벽안개로 말 거는 가을 호수처럼 한 시라도 눈 떼기 싫은 11월 단풍빛처럼 갈 때 가더라도 내 사랑, 넘쳐흘렀으면 좋겠다 지겹다는 건, 마음의 부족함일 테고 지친다는 건, 체력의 부족함일 테지 식지 않는다는 건 사랑의 불씨가 꺼지지 않기 때문이야. 2020. 10. 30. 청풍호반

안개 2020.11.03